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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 살았었지.

 

전에 살던 집엘 한번 가봐야지 하고 벼르다가
유모차를 끌고 나왔다.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슬쩍 지나가 보긴 했지만
그냥 혼자 조용히 가서 둘러보고 싶었다.
나와 함께 살아온 그 숱한 물건들 중
그래도 조금은 건질게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고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고별식이라도 해야지 하는
순전히 감상적인  발로에서였다.


두시 반. 이런 가장 더울 때 나왔다.
지나는 길에 이웃 할머니들께 인사를 드리려 했더니만
다들 안 계시거나
낮잠을 주무시고 있었다.
나린아가도 유모차 안에서 잠들어 버렸다.
슬렁슬렁 유모차나 끌고
동네나 한바퀴 걷는 수 밖에.




할머니, 할아버지~
나린이 왔어요.
불난집 딸이요~
오랜만에 왔건만
무지 조용하다.
자는 아기의 양말을 벗기고
혼자 사진 찍기 놀이를 했다.


지난 1년 간의 추억이 묻어있는 집.
거의 폐허 수준이다.

발디딜 곳 없이 아수라장이 된 집안.
뭔가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에 푹 잠겨버릴거라 생각했는데,
왠걸.
이거 너무 담담하잖아.

불에 탄 흔적이
마치 일부러 만들어 놓은 공간처럼
미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모두 언젠간 사라져버릴 물건들일 뿐.

그래도 하나 아쉬운게 있다면.....

유명 예술가들을 보면
종종 이런 인터뷰 기사를 읽을때가 있다.

-자신이 이렇게 되기까지 가장 영향을 미친 게 무엇이었나요? 

-음. 어린 시절 부모님의 서재?에 들어가 읽던 책들과 그분들의 기록이요. 
 이를테면 일기나 메모, 여행중에 썼던 수첩같은 거.
 반질반질 윤이 나는 나무 바닥의 서재에 앉아
 신기한 그림이 많은 페이지들을 넘기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특히 엄마는 대단한 수집가였지요.
 여행중에 산 재미난 물건들, 주워온 물건들도 많았고 직접 만들거나 그린것들도 많았죠.
 그런 것들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죠.

큭큭. ^^ 이건 나의 로망이었다.
자고 있던 나린이가 칭얼대면서 깼다.

엄마~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참~
난 그런거 없어도 되거든~

아 그래, 아가야~ 








by 바람풀 | 2009/06/17 14:35 | 소소한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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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나린이 이모 9 at 2009/06/18 18:02
아까는 종일 데이비드 달링의 첼로 한 곡을 주욱 듣고 있었더니 막 가라앉았던가 보아. 게다가 전화통화라는 게 어떤 날은 정말 엇박이야... ^^;;; 메일을 쓰기 전에 한번 들어와 보았어. 나린이는 아마 나중에 꼭 저렇게 말하게 될 거야. ^^; 그 전시 말이야. 누구더러 더 잘해달라고 할 수가 있겠어. 그런데도 그건 너무 실망이었어 라고 말해버렸네. ^^; 내 일도 여태 늘 부족한 수준으로 해오면서. 서로 부족한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또 깜박했어. 재미없는 원칙주의자 같으니라구. ^^; 마지막 사진, 아름답다. 물론 우리 나린이가 제일 예술이긴 하지만. ^^ 전시 잘 보고 데이비드 달링의 첼로를 첨부할 테니 들어보아요. ^^
Commented by 바람풀 at 2009/06/19 14:46
잘 듣고 있어.
음, 6시 40분 첫차를 타고 갈거야.
비가 온다니 더 기대돼.
7월을 기대하겠어. ^^
Commented by 조산풀 at 2009/06/22 13:21
어머님이 떠나버린 고향집을 찾았을 때 눈가에 힘이 사라진 아버님의 모습에서 슬픔이 뭉텅이로 묻어나던 지난 시절, 모든 것이 낡아지는 것에 대한 짠한 감상에 졎었었지요.
천천히 낡아진 것이 아니고 순간 부셔진 시간의 페허를 바라보는 띰풀님의 슬픔은 어떤 것이였는 지요?
그런 풍경과 상관없이 강한 햇볕속에서도 잘 자는 나린의 건강한 모습에서 행복이 마음가득 들어앉겠지요.
잘 사세요.
Commented by 바람풀 at 2009/06/22 18:04
'시간의 폐허'가 너무 아름답게? 남아 있던걸요.
이젠 다른 공간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채워나갈려구요.
나린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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