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포토로그


첫 물놀이 바람의 아이들


일요일 오전, 아침 먹고 널브러져 있는데 밖에 혜윤과 아이들이 어슬렁 댄다.
나가보니 금발의 여인과 낯선 남자.
귀촌을 결심한 가족이 TV인터뷰에서 혜윤을 보고 연락을 취했단다.
가족은 2박3일 일정으로 혜윤네 별채에 머무는 중.
내가 엄두도 못 낼일을 그녀는 척척 해낸다.
우리집을 시작으로 마을 투어중이다. 
도서관에 갔다가 지담이네 들를 예정이란다.



오후 세 시. 공소 주일학교에서 선유동으로 물놀이를 갔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집에서 뒹굴대다 쁘카샘 연락을 받고 뒤늦게 선유동으로 갔다.
내가 밖에 좀 나가자고 졸라댈 땐 미동도 안하더니 
나를 재촉하며 물놀이 채비를 하는 지오.
나린이는 침대위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휴대폰과 한몸이 되어 뒹굴뒹굴.
선유동 가자고 아무리 말해도 꿈쩍 않는다.

나린이와 같은 반인 지호 엄마를 만났다. 

"개네는 다른 세계의 아이들이예요."

그렇지. 난 아직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구나.
프까샘과 3년 전 얘기를 나눴다.
그때 열 살이던 여자애들. 팬티 바람으로 신나게 놀았었지.

내년엔 너도 그럴까?

오랜만에 토끼풀 엮어 화관을 만들었다.

햇살에 붉은끼가 묻어날 때 쯤 아침에 만난 노아네 가족이 왔다.

싱그럽던 2021년 오월. 이젠 안녕.







자람터 간판 달기 미술수업

아이들과 함께 만든 마을돌봄 '자람터' 간판
그동안 모아둔 프라이팬과 냄비가 총동원 됐다.

(5월 14일)



자람터 간판 미술수업

(5월 7일 금요일)

송면초 그리기 수업

아이들과 간판 만들기 완성



운전중에 아무튼 기록

1020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을 지나고 있었다. 구겨진 종잇장 같은 잎들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맞은편 도로에서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떨어진 잎들이 회오리처럼 휘감아 돌았다. 오후의 태양이 이마를 비춘다. 자동차 상단에 붙은 가림막을 내려 빛을 막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정미라 3집 앨범에 수록된 광장이라는 노래. 아직 미발표 앨범의 음원을 처음 공개한거란다.

누군가의 노예 누군가의 주인 미지근한 여름 젖은 몸을 말리고 영혼 고독...’ 시낭송하 듯 낮게 읊조리는 노래에 순간 훅 빨려 들어간다. 자동차 계기판 시계를 본다. 오후 336

메타쉐콰이어 가로수 길을 지난다. 가을을 가른 햇살 사이로 투명한 공기가 눈에 보인다. 이번에는 태양이 왼쪽 눈을 비춘다. 이번엔 말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말로가 부른 송창식의 가나다라마바사이 계절 이 시각에 이 길을 지나는 건 축복이다.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을 통과하며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오후 345

 

 

태양이 내 왼쪽 머리에 내려앉았다. 핸들을 틀 때마다 태양의 위치는 달라졌다.

오후 네 시, 지오의 치과 예약. 오늘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 치료다. 치과를 나와서 떡볶이를 사먹었다. ‘오늘, 김밥이란 간판이 눈에 띄었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분식집 같았다. 새하얀 테이블, 노란 의자, 심플한 가구와 소품. 떡볶이를 먹고 갓 튀긴 치킨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굽이굽이 원탑재를 지나던 시각 오후 61. 옆 좌석에 앉은 지오는 제일 커다란 닭다리를 황홀한 표정으로 뜯어먹고는 잠이 들었다.

 

서쪽하늘에 초승달이 걸려있다.

그때 내 앞을 지나가는 묵직한 짐승 한 마리. 멧돼지다.

곧이어 라디오에서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가 흘러나왔다. 영화 벌새에 나왔던 한문 선생님, 배우 김새벽이 시를 낭독한다.

 

(환상의 빛-강성은)

 

나는 운전중이었다 한적한 산길이었고 차는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해체된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문득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기억나지 않고 그러나 이 길은 너무나 익숙해서 생각없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오후였고 오후였고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고 집에서 멀어지고 있고. 옆 좌석에 누군가 잠들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차를 세우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운전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 면허증도 없는 내가 왜 핸들을 잡고 있는 것일까. 모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곤하게 잠들어 있다. 차는 우리를 싣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 집으로 가고 있다. 관목 숲에서 밤하늘로 푸른 박쥐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마치 지금 내 상황을 노래한 즉흥시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620분 집에 도착했다. 주위는 어둠에 잠겨있었다


N과 J 바람의 아이들


N의 성장은 실로 눈부셨다. 

세수를 하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야무지게 빗질하는 뒷모습.
은은히 풍겨오는 살 냄새가 섞인 비누향은 더이상 아이의 냄새가 아니었다.  
날마다 보는 모습인데도 날마다 놀라웠다. 

 '재가 언제 저렇게 컸지? 내 딸 맞나?' 

딱 알맞게 조이는 맵시있는 청바지 라인과 탄력있는 양 엉덩이 아래로 곧게 뻗은 긴 다리는 자꾸만 내 시선을 강탈했다.

작년에 초경을 시작하고 사춘기라 짐작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열 두 살. 
학년 초에 담임샘과 상담할 때만 해도
혼자 책만 보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아주 조금 염려스러웠는데
얼마 전 두 번째 상담에서는 초반과 달리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활달해졌다고 했다.
한 반에 11명, 그 중 여학생이 7명. 
이 시기 여학생들의 특성은 단짝 친구와 늘 함께 붙어다니고 지들끼리 비밀 주고 받는 것.
얼마 전 청주에서 한 여학생이 전학왔고 그 애가 S랑 단짝이 되면서 여학생들 사이의 관계가 재정립되는 일이 있었다.
(또래 엄마들과 얘기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지 않아도 대략 그림이 그려지긴 했다. 
이래서 엄마들은 보지 않아도 안다고 했던가?)
그 둘에 두 명이 더해져 넷이 똘똘 뭉쳐 다니고, 나머지 세 여학생은 각자 따로 논다.
N은 그들 중 어느 누구와도 단짝이 되지 않았다. (마치 학창시절의 나처럼)
단짝 친구가 있다면야 좋겠지만 특별히 자신의 성향과 맞는 아이도 없고, 꼭 누군가와 친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는 듯 했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내내 나도 단짝 친구는 없었다.
애들은 화장실을 갈 때나 집에 갈 때 왜들 그렇게 친구랑 딱 붙어서 다니던지.
이해가 안가기도 했지만 집에 혼자 가는 날엔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시골학교라 애들이 워낙 적다보니 자신과 맞는 친구를 만날 확률도 적겠지.
그 부분에 대해 별 불만이 없는 걸 보면 다행이다 싶다. 

언젠가 널 알아주고 지지해주는 친구를 만날거야. 
살면서 그런 한 사람은 꼭 필요하니까.
엄마는 늘 그럴테고.

지난 주말엔 나랑 J랑 히든 싱어의 '김완선'편을 보고 있을 때 (나만 혼자 엄청 들떠서 봤던가?)
N은 혼자서 넷플릭스 레미제라블 25주년 라이브 공연을 보았다.
세 시간에 가까운 공연을 끝까지 보며 마지막에 눈물까지 흘리던 네 모습.
너는 시간의 틈새로 계속 자라고 자라 나를 놀래키는구나.


J는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럽다.

무뚝뚝한 언니와 달리 막내라 그런지 종알종알 말도 많고 애교도 많다.
친구들과 노는 걸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아 이것저것 모든 활동에 적극적이다.
'문화학교숲'에서 하는 주말 숲놀이터에도 가고, 홍범식 고택 놀이에도 가고, 
청소년 카페 '어스'에서 하는 책만들기 수업도 끝까지 참여하고,꿈터 벼룩시장에도 들떠서 가고...
날마다 피아노 연습도 하고, 얼마전에는 칼림바를 사달래서 그것도 연주하고,
뜨게질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일기도 쓰고....
지금은 내 앞에서 작곡도 하고 있네.
헤드셋을 끼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 다음, 악보를 그리고 있구나.
난 음악에는 영 젬병이었는데.

 "엄마, 난 잘 하는게 많은 것 같아. 피아노도 연주할 수 있고, 그림도 잘 그리고, 뜨게질도 하고..."
 
-너 글도 잘 쓰잖아.

 "맞아."  

너도 얼마 조만간 사춘기를 겪겠지.

성장한 아이들을 보자니
내 인생에 굶은 마디 하나가 새겨진 기분이다.
내 몸 어딘가에 그 흔적, 깊게 새겨진 것 같은 그런 가을이다.







      

맑음의 아이가 필요해 아무튼 기록

49일 째 내리는 장맛비라니.
오전 내내 물폭탄이 쏟아지더니 이제 좀 잠잠해졌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가 계속 떠올랐다.
우리에게도 맑음의 아이가 필요하구나.

입추도 지났는데 장마가 물러가면 불볕 더위가 찾아올지 가을로 접어드는 건지... 
수십 년 간 말로만 염려했던 기후위기를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2020년은 재난의 해로구나. 

이제 장맛비는 다 온 것 같다.
비 그치고 나니
매미와 까마귀 울음소리 가득하다.




자전거와 베드맨턴 아무튼 기록



작년 이맘때 저녁이면 두 딸과 자전거를 탔다.
저녁 식사후 7시에서 7시 반 사이. 
살랑살랑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노을이 질 무렵 
우린 각자의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논길도 달리고 억새가 숲을 이룬 강둑길도 달렸다.
라이딩은 올해도 이어졌다.
자전거를 타고 버섯집으로 가면 몇몇 이웃과 만났다.
굳이 시간을 정해 약속하지 않아도 아이들과 함께 나온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요즘에는 그들과 베드맨턴을 친다.
어제는 봉희씨네 모녀, 혜윤네 식구 3인, 민선이네 3인, 우리 3인. 모두 열한 명이 모였다.
요즘에는 베드맨턴 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나린이랑 나랑, 지오랑 혜윤이 짝이 되어 복식으로 치다가 
둘씩 치다가 파트너를 바꾸며 치기도 한다.
한참 재미나게 치다보면 어느새 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진다.
흰 공을 쫓아 요리조리 뛰어다닌 몸에서 땀이 흐른다.
운동으로 흘린 땀을 바람이 거두어가면 마치 계곡 물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 
몸은 가볍고 개운해진다.
주거니 받거니 둘이서 온몸으로 나누는 대화. 
이 맛에 중독되어 한동안 베드맨턴을 계속 칠 것 같다.

"그래, 잘했어. 옳지. 어어~ 받아. 깔깔깔~ 까르르~"

마을 한 가운데서 우리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내일 만나, 잘 가. 잘 자!"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으면 각자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간다.
소중한 이웃들. 내일 다시 만나요.
내일도 웃으면서 같이 운동해요.


 

당선이 취소되었습니다. 아무튼 기록

지난 몇 달간 초등학생인 두 딸과 집안에서만 지내며 종일 EBS 라디오를 들었다.

엄마, 윤고은의 북클럽 할 시간이야.” 정오가 되면 둘째 딸이 알려줄 만큼 나와 딸들은 이 프로그램의 열렬한 애청자가 되었다. 작가들이 나와 글쓰기 팁도 알려주고, 책 소개도 해주고 낭독도 해주니, 말로 글쓰기를 배우고 귀로 책을 읽으며 낭독의 즐거움도 발견하는 여러모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개학이 거듭 연기되던 4월부터 공모전 소식이 흘러나왔다.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라는 주제로 EBS와 브런치가 함께 글을 공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무심히 흘려들었다. 공모전이라니. 경품 이벤트는 여러 번 도전해봤지만 공모전은 나와 거리가 먼 단어였다.

 

나도 작가다 공모전에서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매일 듣다 보니 어느 순간 귀가 솔깃해졌다. 윤고은 디제이의 나긋나긋한 음성이 너도 도전해 봐,’ 하며 자꾸 부추기는 것 같았다. 마침 써 놓은 것 중에 주제와 부합하는 글 한 편이 떠올랐다. 노트북을 열어 참여방법을 살펴봤다.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를 주제로 글을 쓰고 브런치에 발행하면 된단다. 전부터 이 플랫폼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참에 시작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우선 이곳에 첫 글을 발행하고 브런치 작가로 입문했다. 그리고 응모할 두 번째 글을 적은 다음 나도작가다공모전 키워드를 선택하고 발행 버튼을 눌렀다. ‘이게 이토록 설레는 일이구나.’ 저 우주에 작은 씨앗 하나 쏘아 올리는 심정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플랫폼이라 제대로 응모가 된 건지 몇 날 며칠 자꾸 의구심이 들며 결과 발표만을 기다렸다.

 

공모전에 응모한 글 솔멩이골을 그리다’ https://brunch.co.kr/@hsj511eldb/4 2년 전, 내가 사는 마을에서 이웃들과 진행한 그림책 만들기 수업에 관한 이야기이다. 첫 도전이었고, 녹록지 않은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런 만큼 책이 나오고 그림 전시를 겸한 출판기념회를 마쳤을 땐 누구보다 뿌듯했다. 드디어 결과를 발표하는 날, 오후 5시 반쯤 브런치에 연결된 이메일로 당선을 축하드린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메마른 사막에서 단비를 맞는 기분이 이럴까? 몇 달간 집안 살림에만 묶여 지내던 내게 누군가 던져준 깜짝 선물 같았다.

 

메일에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요청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라디어 녹음 일정에 관한 거였다.

'EBS 라디오 방송국에 가서 내 글을 낭독한다고? 와우' 내가 선택한 시간은 오전 11.

그렇담 집에서 6시에 출발하는 거야. 증평에서 버스를 타고 동서울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일산으로 가는 거지. 지하철 말고 버스를 타고 갈까? 아니야. 증평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갈까? 간 김에 파주 출판단지에 들러 친구도 만나자. 인천에 가서 아는 언니가 하는 책방에도 놀러 가야지

언니, 그냥 차 갖고 가자. 우리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자.”

이웃에 사는 친한 동생한테 함께 놀러 가자 했더니 본인이 차를 운전하고 가겠단다.

그래, 좋아 좋아. 렛츠 고! ”

일 년에 한두 번 서울구경을 할까 말까 한 애 딸린 촌년들, 둘 다 아주 신이 났다.

 

당선 메일을 받고 며칠 뒤, 라디오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녹음 일정 확인했고요, 근데 충북문화재단 사업으로 낸 책에 실은 글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메일에 적힌 마지막 질문은 이랬다. '당선된 글이 브런치북이나 출판사 등에서 기존에 출판된 글이거나, 입상한 적이 없는지 다시 한번 여쭤봅니다.' 이 질문에 난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적어 보냈더랬다. ‘충북문화재단 사업으로 20권 독립 출판하였고, 마을 안에서만 소량 판매했습니다.’라고. 그랬다. 그 글은 마을 주민들의 책 만드는 과정을 그림책으로 엮은 내 책에, 에필로그로 실은 글을 수정해서 보낸 거였다.

 

(문자) 논의를 진행하였으나 출판된 글은 당선작에서 제외됩니다. 2,3차 공모전에 다시 도전해주세요안타까운 답변을  드려 죄송합니다.

(문자) 출판사도 아니고 출판 등록도 안 한 책인데. 흠흠 재고의 여지는 없을까요입에 물고 있던 막대 사탕을 뺏긴 기분이다. 하지만 비굴하다.

(문자) 지역 안에서 마을 주민과 함께 책 만든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픈 맘이 커서 내심 기대 많이 기뻐했는데부탁드려요. 아 진짜 진상이다. 이 문자는 왜 또 보냈을까?

(문자) 네 저희도 내용을 잘 파악하고 논의해봤는데요. 독립출판으로 진행되었더라도 출간된 글이라 조금 힘들 것 같습 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촌 아줌마의 서울 여행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문자를 곱씹으며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간과한 진실과 마주했다. 그림책 만들기 수업 진행은 내 첫 도전이었다. 이웃들이 만들어낸 책을 보며 그들의 글과 그림에 박수 쳐주고 무한 격려를 보냈지만, 정작 내 첫 독립출판물에 대해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책 취급을 안 했던 것이다. 더 제작해서 독립서점에 입고할 계획도 있었지만 인쇄되어 나온 책을 보고 포기했다. 글도 그림도 너무 후져 보였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웠다. 그렇게 묻어버린 책이었기에 출판된 글이라는 자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당선 취소 소식은 마치 이렇게 들렸다. '당신은 이미 그 글로 자신의 책을 만들지 않았나요? 그러니 응모해서 다시 책으로 내지 않아도 돼요. 이미 그걸로 충분해요.

드로잉 수업을 하며 내가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잘 그린 그림에 대한 과도한 기준을 설정하지 마세요.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고유의 것을 찾으세요. 지금 그리는 그림은 여러분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건 언제나 내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야심 차게 계획했던 서울 여행은 물 건너갔지만 나도작가다공모전 덕분에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그걸로 족하다.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이제는 좀 나를 다독여 주라고, 엄격한 잣대는 그만 걷어 치우라고. 내안의 말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당선 취소가 안겨준 값진 선물이다.  그래도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드디어 개학! 아무튼 기록


오랜만에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내고 돌아선다.

반짝거리는 아침이다. 오월의 햇살이 닿은 모든 것이 눈부시다.

얼마 만에 홀로 맞이하는 아침인가?

아이들 개학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이 쓸쓸한 기분은 대체 뭔지.

 

 "여러분 친구들하고는 1m 이상 거리를 유지하고, 급식시간에 먹다 남은 음식도 친구에게 나눠주면 안 돼요."

 

어제 나린이 담임선생님이 화상 수업을 하며 중대본과 교육청에서 내려온 지침을 아이들에게 일러주었다그동안 친구들이 남긴 급식 디저트는 모두 나린이 차지였는데 이제 그것도 못 먹게 되었구나.

 

 

 "주말에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안 돼요?" 


 **이 목소리다. 이 녀석, *이네 자주 놀러 가는 거 다 안다

지난주에도 *이네 근처 개울가에서 물놀이했으면서... 전교생이 40명도 안 되는 시골 초등학교다마을 안에서 친구들과 늘 부딪치며 놀던 아이들에게 이 코로나 사태는 더욱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불특정 다수가 모여 사는 도시가 아니어서 코로나에 대한 경각심이 덜했던 것도 사실이다다들 뉴스를 통해서만 심각성을 인지했다그런 아이들이었기에 학교에서 종일 마스크 쓰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내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마스크 쓰고 가고 되도록이면 떨어져서 놀아요." 


말을 전하는 선생님도, 받아들이는 아이들도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린이는 방학 동안 거의 집안에만 있었다햇빛을 보지 않아 얼굴이 창백해서 푸른곰팡이가 슬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열두 살 사춘기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오전 열 시가 넘어도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개학하면 과연 제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까 염려했는데, 오늘 일찍 일어나 평소에 거르던 아침밥까지 먹고 학교에 갔다어제까지만 해도 "학교 가기 싫은데 마스크까지 쓰고 가야 하다니." 했던 나린이었다.

 "그러게 제때에 갔어야지. 이제 가기 싫어졌잖아.” 

옆에 있던 동생 지오도 한마디 했다. 그랬던 아이들이 오늘은 상기된 얼굴로 일찍 집을 나섰다아이들은 잘 적응했다. 문제는 나였다. 아이들을 보내고 돌아서자 힘이 탁 풀렸다요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내 일상이 제일 엉망이었다

아이들 핑계로 아침밥은 거르기 일쑤였다. 활동이 줄어든 아이들도 밥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배고프다면 마지못해 밥상을 차렸고 아이들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오늘부터 5대 영양소가 고루 들어간 급식을 제 때에 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이제 내 일상을 회복해야지.

   

아이들이 없는 아침. 마당으로 나가 텃밭의 풀을 뽑고 작물에 물을 주었다샤샤샥~ 오월의 바람이 스치고 가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아카시아 향이 실려왔다. 이 향긋한 냄새와 바람을 느낄 수 없는 아이들오랜만에 본 친구들과 살을 맞대고 놀 수 없는 아이들. 어쩌면 이건 어른들의 지나친 염려일지도 모른다아이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을 잘하니까. 저 초록잎처럼 싱싱하고 반짝이니까그런데 왜 반짝이는 것들을 보면 울컥해지는 걸까.  





내년 봄에 또 만나. 아무튼 기록


보슬비 내리는 아침, 뒷산을 오르다가 각시붓꽃을 만났다.

이슬방울 머금은 꽃은 깊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그 새초롬한 모습에 반해 욕심이 발동했다.

 

저 꽃을 캐서 우리집 마당에 옮겨 심을까?’

 

집에 돌아와서도 온종일 꽃을 생각했다

결국 어린 딸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면 안 돼. 거긴 개네 집이야.

여기 데려오면 엄마가 없잖아.

엄마가 엄청 속상해 할 거야. 절대 안 돼.“

 

다섯 살 나린이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절대에 힘을 주고...

 

집 지어 이사하기 전에 3년 반 정도 임시로 지낸 집이 있다

마당을 나와 조그만 계곡을 건너 산으로 오르는 조붓한 길에서 이 꽃을 처음 보았다

꽃과 눈이 마주쳤을 때, 숨이 멎을 뻔 했던 그 설렘을 나는 잊지 못한다.

첫째 아이가 배밀이를 할 무렵이었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시골로 왔지만 이듬해에 태어난 아이를 온종일 혼자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살이 쪽쪽 빠지고 다크 서클이 얼굴 전체에 번질 만큼 힘겨운 나날이었다

서른여섯, 늦은 출산이었다

아기가 낮잠에 들면 후다닥 숲으로 달려가 오솔길을 걷는 게 나의 유일한 쉼이었다

이것도 그나마 힘이 붙어있을 때라야 가능했던 일

4월 하순께 그날도 봄 햇살로 부스스한 얼굴을 씻으며 숲길로 접어들었다.

걸음걸음 바스락대는 내 발소리가 들렸다. 봄 숲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가의 얼굴 같았다.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소나무 사이를 통과한 햇살을 받으며 발밑에 피어있던 각시붓꽃.

 

어머나!’ 하고 놀라던 내 시선과 아 들켰네.’ 하며 수줍게 바라보던 꽃과의 첫 만남이었다.

꽃을 감싸고 있는 가늘고 뾰족한 초록잎들이 봄바람에 살랑거렸다.

 

꽃봉오리 모양이 붓을 닮아서 붓꽃이라지.

작게 자라는 각시붓꽃은 수줍은 색시 같아서 그렇게 부른다지. 애기붓꽃이라고도 한다지.

그냥 보랏빛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색이다

연보라, 짙은 보라, 분홍보라, 파랑보라, 꽃잎 하나에도 각기 다른 농도와 색감의 보랏빛이다

잠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는 자연이 만든 색이다.   

 

그 집을 떠나 옆 마을 산 밑에 집을 지어 이사했다

주변이 온통 마사토라 마당은 거름기 없는 모래밭이나 다름없었다

빈 마당에 거름을 주고 꽃모종을 사서 이 꽃 저 꽃 참 많이도 심었다

심지어 뒷산에 핀 양지꽃과 제비꽃을 옮겨심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임을 알게 되었다

냉이와 쑥을 비롯해 씀바귀, 토끼풀, 지칭개, 민들레, 제비꽃 등 

온갖 풀꽃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해마다 싹을 틔웠고, 여름이면 무성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사람이 곁에 두고 가꾸지 않아도 때가 되면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있다

그래서 야생화라 부르는 거겠지

그 계절에 그곳을 지나는 자만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알아보는 자에게만 허락된 은밀한 기쁨이다.

 

나린아, 알려줘서 고마워. 내년 봄에 숲에서 또 만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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