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카페 '여름'에서 그림일기


손글씨로 일기 쓰기의 좋은 점.

그날, 그 시각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내 필체로 남길 수 있다는 것.

수정 불가.
  


하루 한 시간 정도
 글 쓰고 그림 그리며
멍때리는 시간이 필요한 때. 









당신의 귀한 손 그림일기


아이들 데리고 며칠 친정에 다녀왔다.
엄마 모시고 서점에 가서 꽃그림 따라그리는 드로잉북과
스케치북, 색연필 세트를 사드렸다.
"엄마가 키우는 꽃들을 그려봐."
아파트 베란다 한가득 꽃을 가꾸고 ...
조롱박 말려서 인형 만들고
뜨게질로 인형 모자랑 옷 만들어 입히는 엄마.
바로 서점 안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신다.
마을 주민들 드로잉 수업을 하지 않았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다.
자식들 낳아 키우고, 살림하고, 농사짓고, 가슴 치고...
신산한 삶 마디마디 박혀있는
그대의 귀한 손.
그 손들이 그려내는 그림은 진정 아름답다.



"아줌마,
엄마,
마누라
그들이 그림을 그린다.
밥주걱으로 단련된 터치가 스케치북위에서 환장을 한다."


이웃마을에서 드로잉 수업하는 한 아줌마가
그림 그리며 이런 시를 읊었단다.











지오의 샌들 바람의 아이들



얼마 전 읍내에 있는 만년 신발에서 지오에게 샌들을 사주었다.

아이는 내가 권한 샌들을 신어보았지만 모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편한 것만 권하는 엄마와 한참 동안 고르지 못하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장님이 큐빅 박힌 화려한 샌들을 지오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는 이런 걸 좋아하는데 엄마 눈치 보는 것 같네요. 제가 척 보면 알지요.”

 

글쎄요. 이거 분명 안 신을 텐데. 지오는 내가 더 잘 아는데.....’


안다고 자신하는 사실이 때론 오류일 수 있다는 반성을 하며

지오에게 분홍리본 샌들을 신겼다.

걸을 때마다 신발 밑창에서 나이트클럽 조명 같은 빛이 반짝였다.


너 그거 신을 거야?”


응 신을래. 진짜지? 맘 안 변하지?”


지오는 샌들을 신고 차 안에 들어와서 닳아빠진 운동화로 다시 갈아 신었다.

심상치 않은 행동. 재차 물었다.


너 그거 안 신을 거면 지금 바꾼다.”


엄마, 지오 이거 안 신을걸.” 옆에서 나린이가 한마디 거들자,


신을 거란 말이야! 으엉~~ 앙앙.” 울음을 터뜨린다.


신발가게에서 차까지 약 6미터 도보 이후 지오는 단 한 번도 이 샌들을 신지 않았다.

 

 

문득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신고 버린 신발들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누구에게 물려받은 건지, 누가 언제 사 주었는지,

얼마 동안 신었고, 그때 키는 얼마였는지 등등.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동안 그린 그림으로 작은 전시를 열 면 재밌을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의 신발전

 

사는 동안 신고 버리는 신발이 몇 켤레나 될까?

나는 지금까지 어떤 신발들을 신고

얼마만큼의 거리를 걸어왔을까?

내 신발도 그려봐야지.





밤마다 이러고 놀아. 그림일기



7월 24일

저녁밥 먹는 시간.

"엄마, 학교 운동장 가자."
오늘도 어김없이 졸라대는 지오.

"엄마, 오늘은 좀 피곤한데. 내일 가자."

"싫어. 지금 가야 해."

"그럼 엄마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언제 다 먹어? 두 숟갈 남았다며 왜 아직도 먹어."

일곱 살이니까 봐주겠어.
 
어스름한 학교 운동장.

느티나무 아래에 누워
나뭇잎 사이로 슝슝 보이는 하늘 구경하고
운동장 몇 바퀴 달려주고,
그네 타고,
운동기구 한 번씩 해보고,
달빛 아래 그림자놀이도 하고,
깜깜해지면 운동장을 휘저으며 춤을 춘다.
한 시간 정도 놀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지오야, 네 덕분에 잘 놀았어.
우리 내일 또 오자,"

잊고 있던 어릴 적 장면이 떠올랐다.
여름방학이면 동네 아줌마, 아이들이
저녁 먹고 학교 운동장에 모여 놀던 기억. 









소주병,콜라병,맥주캔 그림일기



7월 25일

어제도 종일 세찬 비가 내렸다.
저녁에 알탕을 끓였다.
정목수와 참이슬을 나눠마시며
알탕 건더기를 와사비장에 찍어 먹었다.
밤에는 맥주를 마시며 '악녀'를 보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와 
플래시 터지는 듯한 번갯불이 
유혈이 낭자한 액션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었다. 

비가 그치고 오늘은 햇빛이 쨍하다.
매미 울음소리가 한층 커졌다.
오전에 열일하고 맞는 여유로운 오후. 

 유치원 빠지고 집에 있는 지오랑 그림을 그린다.

쵸코칩 쿠키눈의 소녀.
나 어릴때도 저렇게 그렸는데.




소주병, 콜라병, 찌그러진 맥주캔.















블루베리 따는 미경언니 그림일기




그림일기를 쓰자!














마을 카페에서 드로잉 수업을. 소소한






마을 무인 카페 '아낙'에서 하는 일요 드로잉 수업.





이곳은 신혼집이 불에 타버린 뒤
 우리 가족이 삼년 반 동안 살았던 공간이다. 


그곳이 무인 카페로 변신했고,


지난주부터 마을 사람들이 일요일마다 모여 그림을 그린다.


나린이 오줌이 짙게 배어있는 마룻바닥.
겨울에 여기서 연탄난로를 땠었지.
생쥐가 하도 많아서
나린이 유모차에 태워 산책하러 나갈 때
끈끈이를 바닥에 놓고 나갔드랬지.
작은 쥐들이 붙어서 꿈틀대고 있을까 봐
겁이 나서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정목수 일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곤 했지.
이곳에서 둘째가 태어났지.    



카페로 변신한 이곳에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될 줄이야.



마을 토박이 정임언니가
쓰윽 쓱~
 나무 두 그루를 그린다.
언니처럼 싱그럽다.

요즘 그림의 재미에 푹 빠진 은희 언니는
두 아들을 데려와 함께 그린다.
축구 하다가 오른팔이 부러진 감영이는
2주 연속 왼손으로 그리는 투혼을 발휘.



가장 연장자, 60이 넘은 미현 언니도
남편이랑 같이 와서 그림을 그린다.

나이 드신 분일수록
그림 속에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언젠가 마을 노인회관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그분들께 배우고 싶다.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언니를 닮은,
 정임 언니의 그림.


자기 모습과 인생이 그대로 투영되는 그림의 세계.
앞으로 이분들이 그려 낼 그림이 엄청시리 기대된다.






열 번째 드로잉 수업 소소한



누구 말마따나 '잘 그리지도 못하면서'
드로잉 수업을 하고 있다.

읍내 명덕초등학교 교실에서 매주 화요일 오후 3시.
선생님 여덟 분이 모여 그림을 그린다.

열 번째 드로잉 시간.

수업 중 소개한 '서촌 오후 4시', '펜과 종이만으로 일상드로잉' 책 두 권을
공동으로 구입하고, (자료용으로 그냥 쓱 보여드린 건데 알아서 구매까지.)
일박이일 서촌 여행까지 다녀오셨단다.


현장에서 직접 그리면 좋지만 교실 안을 벗어날 수 없어서
주로 휴대폰 액정 보고 그리는 한계가...

마침 선생님 한 분이 겨울방학 때 드로잉 여행 가자는 제안을 했고

다음 달부터 계를 들기로 했다.

그땐 스케치북 들고 다니며 아무 데서나 자유롭게 그릴 수 있을 듯.

그림이 불러온 상상이 드로잉 여행이라는(바라건대 해외로)

멋진 계획으로까지 연결되었다.




"선생님, 학교 다닐 때 그림 좀 그리셨나봐요?"

"아뇨, 전혀. 저 그림 그리는거 싫어했어요."

이분은 56세에 그림을 시작한 '서촌 오후 4시'의 저자와 동명.
그 자리에서 드로잉 모임 이름이 '명덕 오후 3시' 로 결정되었다. 





같은 공간, 다른 느낌의 두 그림.


우리 동네 주민, 박쌤의 그림. 
자기 그림에 좌절하면서 중간에 포기할 뻔 했다.
"제 그림은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선생님 강점이예요.
전 그렇게 그리고 싶어도 안돼요." 




카페에서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드로잉 여행을 제안한 J쌤.

JTBC 비긴어게인 보다가 이 장면에 꽂혀서 그림까지.


"윤도현 다리 짧게 그린 거 아시죠?

쌤은 하체를 짧게 그리는 경향이 있어요."

쓸데없는 지적질.



 

수십년 써 온 내 안경도 다시 보이고,

아이들 모습도 더 자세히 보게 되지요.

함께 사는 반려견들도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극.


수업 때마다 아는 작가들 끌어 모아 이야기를 이어간다.
주로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각적으로 사고 하기에 관한 이야기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데 공포증이 있던 내가
말하는 걸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점점 밑천이 떨어져간다.
공부 해야겠다.  

 



이쁘지 않나요? 소소한



이것은,

아홉 살 나린이의 치아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자마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

"아으 징그러워."
 
젊은 치과 여의사 선생님의 반응,

"어머 귀엽지 않나요?"

(좌 우측 사랑니를 가리키며)
"이런 건 이쁘지 않나요?"

"네 자세히 보니 그러네요."
(하지만 여전히 찌리리한 소름이
목덜미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잇몸 속에 올망졸망 숨어있는 영구치들.
조만간 유치를 밀어 올리며 돋아날 것이다. 
잠복해있는 성장의 증거.
 땅속에 묻혀 있는 작은 감자알 같다.
저 가운데 치아는 올챙이 같고.
사랑니는 저렇게 생겼구나.

"선생님은 진정한 치과의사시네요."

저 사진이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면
날마다 사람들 입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곤혹스럽겠는가?









굿바이. 허세라스~ 그림일기



지난 5월, 생애 첫 선글라스를 구입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어느 주말 밤,
전부터 사고 싶던 선글라스 검색에 돌입했다.
몇 개 봐 둔 게 있었다.

결재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하는 행위는
이미 찜해 둔 걸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보고 또 보기.
고가일수록 그 횟수는 많아진다.

내 눈에 들어온 건
마스카(브랜드명) 블론디(제품명) 로즈핑크.
 요즘 대세인 미러.
게다가 유니크한 팔각 프레임.

핫한 여자 연예인과 모델들이
공항패션으로 착용했다는 게 포인트.

마흔 중반의 시골 아줌마라는 본분을 잠시 망각했다.
그때 나는 스페인의 어느 뜨거운 도시를 거닐고 있었다.
그런 내게 멋진 선글라스를  씌워주고 싶었다.
수십 번 보고 또 보기에 지친 뒤에야
 결제 버튼을 눌렀다.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다음 날 아침, 부랴부랴 구매 취소 버튼을 찾았다.
공지사항을 보니 취소는 회사에 문의하란다.
월요일 아침부터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출근 전인지 전화를 안 받았다.
그때 제품을 발송했다는 문자가 왔다.

'받아보고 반품해야지.'

물건이 도착했다.
써봤다.
멋졌다.
과감히 텍을 떼버렸다.
아이들이 선글라스 낀 나를 보고 웃었다.

"엄마, 너무 웃겨. 
메뚜기 같아.
모양이 왜그래?"

개의치 않았다.
운전할 때도
괴산 장날에도,
읍내 거리를 거닐 때도
열심히 쓰고 다녔다.

그리고 며칠 전에 잃어버렸다.

읍내에서 볼일을 볼때 차문을 잠그지 않는데
잠시 가게에 들른 사이에 누군가가 훔쳐간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당황한 부분은 도난을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며칠 비우는 걸 빼고는 집을 나설때도 문을 잠그는 법이 없다. 
  장기간 배낭 여행을 다일 때도 도난을 당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심지어 종각역 지하도에 흘린 지갑이
고스란히 택배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누군가 지갑 안에 있는 안경점 명함을 보고 전화를 걸어
내 연락처를 물어본 것.)

대낮에 누군가 내 차문을 열고 
케이스를 통째로 집어가다니...
불시에 옆구리를 가격 당한 기분이었다.  

내 생애 첫 선글라스
연예인 선글라스
팔각 프레임 선글라스
미러 선글라스
비싼 선글라스를
두 달만에 잃어버렸다.

이상하게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마치 선글라스가 아닌
내 허세를 도난 당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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